
이 글은 블랙 위도우를 과거, 서사, 해석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살펴보는 영화 리뷰다. 어벤져스의 핵심 멤버였지만 늘 조연에 머물렀던 나타샤 로마노프가, 단독 영화에서 어떻게 자신의 과거와 레드룸, 가짜 가족을 마주하며 매듭을 짓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동시에 옐레나, 알렉세이, 멜리나가 만들어 내는 기묘한 가족극과 MCU 세계관에서 이 영화가 갖는 의미를 정리해, 정주행용·블로그용 리뷰로 활용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블랙 위도우' 나타샤 과거청산
블랙 위도우는 엔드게임 이후에 개봉했지만, 시점은 시빌 워 직후로 돌아간다. 이미 어벤져스의 일원으로 세계를 구해 온 나타샤는 법적으로는 수배자가 된 상태이고, 혼자 숨어 지내며 정리되지 않은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이 영화의 핵심은 바로 그 과거, 즉 레드룸과 드레이코, 부다페스트 사건으로 상징되는 “살인자 시절의 자신”을 어떻게 청산하느냐에 있다. 이전까지 MCU에서 나타샤의 과거는 몇 마디 암시와 농담 섞인 대사 속에만 흩어져 있었다. “부다페스트 기억나?”라는 말은 계속 반복됐지만, 관객은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었다. 블랙 위도우는 그 공백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첫 영화다. 영화 초반 1995년 오하이오 시퀀스는 나타샤 과거청산 서사의 출발점이다. 이 장면에서 나타샤는 미국 교외에 사는 평범한 소녀처럼 보인다. 푸른 교복, 동생 옐레나와의 장난, 퇴근 후 함께 저녁을 먹는 부모. 그러나 이 행복한 그림은 곧 “임무 종료”라는 한마디에 무너진다. 알렉세이와 멜리나는 실제 부모가 아니었고, 이들은 러시아 스파이로서 미국에 잠입해 있었던 것이다. 가족의 해체는 너무나 갑작스럽고, 아이들에게는 설명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이때 나타샤의 눈빛에는 어린 나이에 이미 ‘상황을 이해하는 사람’의 체념이 스친다. 훗날 그가 냉소적이고 계산적인 스파이로 성장하게 될 배경이 이 몇 분 안에 압축되어 있다. 이후 레드룸에서 훈련받는 과정은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길게 묘사되지는 않지만, 대사와 짧은 플래시백, 그리고 나중에 등장하는 수많은 위도우들의 모습 속에서 그 잔혹함이 암시된다. 통제와 세뇌, 강제 불임 수술 같은 요소들은 나타샤가 ‘자신의 몸과 선택권을 빼앗겼던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그가 어벤져스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과거를 이야기할 때의 태도는, 사실 이런 경험을 억지로 가볍게 포장하려는 생존 전략에 가깝다. 블랙 위도우는 이 포장을 벗겨내고, 나타샤가 진짜로 무엇을 겪었는지 직면하게 만든다. 부다페스트 사건은 과거청산의 핵심 에피소드다. 나타샤는 쉴드에 합류하고 “레드룸과 결별하기 위한 마지막 임무”로 드레이코를 제거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그의 어린 딸까지 죽었을 것으로 믿었다는 점이다. 영화는 이 지점을 굳이 미화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를 미끼로 삼아 표적을 제거하는 작전 자체가 윤리적으로 죄악에 가깝고, 나타샤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그는 “이걸로 레드룸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이라는 절박함 속에서, 그 죄를 감수하는 선택을 했다. 그 이후 나타샤에게 부다페스트는 “자유를 얻은 장소”이자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장소”로 남는다. 블랙 위도우는 이 죄책감을 다시 끌어올려, 나타샤가 진짜로 과거를 청산하도록 만든다. 드레이코가 살아 있고, 레드룸 시스템이 여전히 수많은 소녀들을 조종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 딸조차 살아 ‘태스크마스터’라는 병기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날 때, 나타샤는 자신이 그동안 믿고 있던 “나는 이미 과거와 결별했다”는 전제를 부정당한다. 어벤져스로서의 활약은 일종의 속죄처럼 기능했지만, 정작 범죄의 근원은 건재했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나타샤가 취할 수 있는 진짜 과거청산은, 죄책감을 애매하게 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레드룸을 물리적으로 붕괴시키고, 자신이 만든 희생자와 직접 마주하는 일이다. 클라이맥스에서 나타샤가 드레이코의 향수 페로몬 제한을 깨기 위해 일부러 코를 꺾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오랫동안 자신을 지배했던 시스템의 룰을 스스로 부수고, 그에 대한 두려움과 통제에서 벗어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위도우들을 하나씩 해방시키고, 태스크마스터와도 싸움 이후에는 “너는 피해자였고, 나는 가해자였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손을 내민다. 과거청산은 가해와 피해를 정확히 직면하는 일에서 출발한다는 메시지가 여기에 담겨 있다. 결국 나타샤는 레드룸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그리고 그 잔해 속에서 다시 길을 나서는 것으로 자신의 과거를 어느 정도 정리한다. 엔드게임에서 보여준 희생은 이 영화 이후, 조금 더 단단해진 선택처럼 느껴진다.
가족 서사
블랙 위도우가 단순한 스파이 액션을 넘어서는 이유는, 중반부 러시아 시골집에서 펼쳐지는 가족 저녁 식사 장면에 있다. 이 집에는 피가 한 방울도 이어져 있지 않다. 알렉세이는 레드 가디언이라는 구소련 슈퍼 솔져, 멜리나는 레드룸의 과학자, 나타샤와 옐레나는 임무 수행을 위해 잠시 “딸 역할”을 맡았던 스파이 소녀들이었다. 세 사람은 서로를 속이기 위해 가족 연기를 했고, 아이들에게도 그것이 임무였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드러난다. 그러나 영화는 이 ‘가짜 가족’의 감정이 반드시 가짜였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저녁 식사 장면을 보면, 처음엔 전형적인 불편한 가족 모임처럼 시작된다. 알렉세이는 자기 영광시절 무용담을 늘어놓고, 멜리나는 감정 표현을 절제한 채 냉소적으로 응수한다. 옐레나는 계속 농담과 빈정거림으로 분위기를 띄우려 하고, 나타샤는 이 모든 걸 애써 무시하려 하면서도 눈에 띄게 날카로워진다. 대사만 놓고 보면 서로를 비난하고 상처 주는 말투가 오가지만, 카메라는 네 사람의 표정에 길게 머물며 그 안의 복잡한 감정을 보여준다. 억울함, 그리움, 분노, 미련, 그리고 아주 작은 애정까지 뒤섞여 있다. 특히 옐레나의 입장은 이 가짜 가족 서사의 감정 중심이다. 그는 정말로 이 가족이 “진짜”라고 믿고 자라났고, 임무 종료 후에도 오랫동안 그 시간을 유일한 행복으로 기억해 왔다. 그래서 나타샤가 “그건 다 거짓말이었다”라고 말할 때, 옐레나는 격하게 반발한다. “나한테는 진짜였어”라는 옐레나의 말은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 중 하나다. 이 한 문장에 가짜 가족, 연기였던 일상, 이용당한 어린 시절이 어떻게 한 사람의 정체성을 만들었는지가 압축되어 있다. 옐레나는 그 이후로도 계속 농담을 던지지만, 그 농담의 밑바닥에는 “그때 내가 느낀 사랑과 안정감은 도대체 뭐였지?”라는 질문이 흐르고 있다. 나타샤 역시 이 관계를 부정하면서도 완전히 끊어내지는 못한다. 그는 어벤져스를 자신의 “진짜 가족”이라고 여러 번 언급해 왔지만, 블랙 위도우에서는 자신이 먼저 떠난 이 ‘가짜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애착이 동시에 드러난다. 알렉세이와 멜리나를 향한 분노는 단순한 배신감이 아니다. 스스로 알아서 살아남았다고 믿어왔지만, 사실 아직도 어린 시절 버려졌다는 상처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이다. 스파이로 훈련받은 그의 습관은 감정을 농담으로 얼버무리는 것이지만, 가족 식탁 앞에서는 그 위장이 잘 통하지 않는다. 알렉세이와 멜리나도 의외로 입체적이다. 알렉세이는 얼핏 보면 자기 영광과 허세로 가득 찬 실패한 영웅처럼 보이지만, 감옥에서 나타샤의 편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장면이나, 딸들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고백하는 순간들을 통해, 그 역시 “가짜였던 적 없는 아빠”의 일면을 드러낸다. 멜리나는 레드룸 시스템의 핵심 연구원이자, 동시에 그 시스템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무너뜨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녀의 배신과 협력 사이 복잡한 선택은, 단순한 악역·조력자 이분법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 네 사람의 관계는 결국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혈연이 아니더라도 함께 밥을 먹고, 서로를 돌보고, 동시에 상처를 주는 관계가 가족일 수 있는가? 블랙 위도우는 여기에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가짜로 시작된 관계라도, 함께 보낸 시간 속에서 쌓인 감정은 진짜가 될 수 있고, 그 진짜 감정은 나중에라도 서로를 다시 구할 이유가 된다. 레드룸을 무너뜨리는 마지막 작전은, 이 네 사람의 공동 작업으로 완성된다. 처음엔 서로를 버렸던 관계가, 끝에서는 서로를 선택하는 관계로 뒤집히는 것이다. 스파이 액션의 외피 속에서, 블랙 위도우는 이렇게 꽤 정통적인 가족 드라마를 완성한다.
해석과 평가
블랙 위도우는 개봉 당시부터 “너무 늦은 솔로 영화”라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이미 엔드게임에서 나타샤의 이야기가 비극적으로 마무리된 이후였고, 그 뒤에 나온 영화가 과거를 다루는 프리퀄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은 분명 아쉬움이다. 만약 이 영화가 페이즈 3 초반, 혹은 최소한 인피니티 워 이전에 나왔다면, 나타샤의 선택과 희생이 훨씬 더 입체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지금의 위치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결말을 향해 가는, 일종의 긴 플래시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랙 위도우가 완전히 늦은 영화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엔드게임 이후에 이 작품을 보게 됨으로써, 관객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제대로 작별하지 못했던 캐릭터”와 뒤늦게 인사를 나누게 된다. 과거 어벤져스 영화들에서 나타샤는 늘 팀 안에서 움직이는 조력자, 혹은 감정의 중재자 역할이 많았다. 개인적인 상처와 욕망을 깊이 들여다볼 기회는 적었고, 서사적으로도 다른 영웅들의 ‘성장’을 돕는 위치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블랙 위도우는 처음으로 카메라를 그의 내면에 집중해서 비춘다. 그렇게 보고 나면, 보르미르 절벽 위에서 보여준 그의 선택이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액션과 연출 측면에서 보면, 블랙 위도우는 MCU 스파이 계열 영화인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와 자주 비교된다. 윈터 솔져가 정치 스릴러 톤과 현실적인 액션을 통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면, 블랙 위도우는 그보다는 한층 만화적이고 폭발적인 클라이맥스를 택한다. 하늘 위 떠 있는 레드룸 요새에서 벌어지는 추락 액션, 태스크마스터와의 공중전 등은 물리적 현실감을 어느 정도 희생한 대신, 시각적 스펙터클을 강화한 선택이다. 이 부분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초반과 중반의 스파이·첩보 분위기를 좋아한 관객이라면, 마지막이 다소 과장됐다고 느낄 수 있다. 반대로 MCU 식 클라이맥스를 기대한 관객에게는 적당한 타협안처럼 보인다. 서사적으로 가장 강한 부분은 역시 옐레나의 존재다. 옐레나는 블랙 위도우 이후 다른 작품들로 이어질 ‘새로운 블랙 위도우’이자, 나타샤의 뒤를 이을 세대 상징처럼 그려진다. 그는 나타샤와 비슷한 상처를 지니고 있지만, 훨씬 직설적이고 솔직한 태도로 세계를 대한다. “영웅 포즈”를 놀리거나, 가짜 가족에 집착하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에 나타샤의 무덤을 찾는 장면은, 앞으로 MCU가 이 캐릭터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이어갈지 기대하게 만든다. 즉, 블랙 위도우는 나타샤의 과거를 정리하는 동시에, 옐레나라는 새로운 주체를 세계에 소개하는 이중의 역할을 한다. 단점도 분명하다. 드레이코와 태스크마스터는 설정상 흥미로울 수 있었지만, 영화 안에서 악역으로서 충분히 활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태스크마스터의 정체가 드러난 이후, 캐릭터의 감정선이 깊게 그려지기보다는 상징적인 피해자의 위치에 머무른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레드룸 시스템과 여성에 대한 폭력, 착취라는 강력한 주제를 던져 놓고도, 끝까지 밀고 가지 못한 느낌이 남는다. 이 때문에 일부 관객은 블랙 위도우가 “할 얘기는 많았는데, 디즈니·MCU 톤 안에서 안전하게 정리한 작품”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블랙 위도우는 나타샤과거청산, 가족서사, 해석이라는 키워드로 충분히 의미를 가진다. 가짜 가족이 진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 레드룸의 피지배 구조를 부수고 위도우들을 해방시키는 결말, 나타샤가 자신의 죄책감을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여정은, 늦게나마 이 캐릭터가 받아야 했던 서사를 어느 정도 채워 준다. 다만 이 영화가 가진 감정적인 힘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는, 이전 어벤져스 시리즈와 엔드게임까지 함께 기억하고 보는 편이 훨씬 좋다. 그때 비로소 블랙 위도우는 “뒤늦게 온 프리퀄”이 아니라, “엔드게임 이후 건너뛰었던 작별 인사”로 재해석된다.
블랙 위도우는 과거, 서사, 해석이라는 키워드로 보면 늦게 도착한 솔로 영화이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작별 인사다. 레드룸과 부다페스트로 상징되는 과거의 죄책감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가짜로 시작된 가족이 진짜 관계로 바뀌어 가는 과정 속에서 나타샤라는 인물이 비로소 하나의 완성된 서사를 갖게 된다. 악역 활용과 클라이맥스 톤에서는 아쉬움이 남지만, 옐레나라는 강렬한 후계자와 함께 감정적 여운을 남기며 MCU 속 블랙 위도우의 자리를 다시 한번 새긴다. 다시 볼 계획이라면 오하이오 프롤로그, 러시아 시골집 저녁 식사, 드레이코 대면 장면을 중심으로 “이 사람이 무엇에서 도망쳤고, 결국 어디까지 돌아갔는지”를 떠올리며 감상해 보길 추천한다.